원래 이름은 永通桥, 통주에서 8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하여 八里桥라 일컬어졌다. 북경으로 들어가는 옛 다리 세 개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둘은 卢沟桥와 朝宗桥) 正统 11년(1446)에 건설되었다. 남북으로 通惠河 위에 놓여 있다. 돌을 다듬어 券拱 세 개를 설치했다. 중간의 大券은 무지개 모양으로 돛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높게 만들었다. (券을 拱으로도 설명) 남북으로 길이는 50m, 너비는 16m이다. 33쌍의 望柱마다 석사자를 조각해놓았다. 다리 남변 동쪽 200m 지점에 옹정제가 세운 비석이 있다.
전형적인 直拱橋 양식으로, 대량의 화물 운송에 맞도록 설계되었다. 가운데 橋拱은 높이 8.5m, 너비 6.7m에 달한다. 다리 동서 양쪽 언덕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鎭水石獸, 속설에 따르면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인 蛤蝮이라고 한다. 홍수를 막기 위한 주술 조형의 하나로 간주된다. 拱 위에 조각된, 두 개의 뿔이 달리고 털이 곤두선 채 성난 눈으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 이는 毛水獸로 알려져 있다.
함풍 10년(1860) 7월, 2차 아편전쟁의 발발. 천진 담판의 결렬, 영불 연합군 천진에서 북경으로 전진. 8월 7일 6000명의 연합군은 통주 郭家墳에서 세 갈래로 나누어 팔리교를 향해 돌격했다. 9월 21일 전투가 일어났고, 당시 팔리교를 지키는 청군 3만은 전멸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咸豊 황제는 承德으로 몸을 피했고, 圓明園은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팔리교는 북경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로, 전철 八通線, 京通快速路, 京哈高速道路, 通燕高速道路 등이 이곳을 통과한다. 다리 남쪽에 팔통선 八里橋站이 있다.
이 다리를 大通橋로 표기한 연행록도 적지 않은데 오류이다. 대통교는 북경성 외성의 東便門 밖에 있던 다리로, 여기에는 통혜하로 운송된 화물이 하역되는 부두[碼頭]가 있었다.
최연(1503~1549), 간재집 권 3, 過永通橋 二首 ○ 橋在通州城西十里. 跨大河. (1548)
江淮遠接帝城東. 架漢飛橋號永通. 浪役神鞭羞血石. 謾誇金壁笑垂虹. 不勞靈鵲塡河上. 自有蒼龍落水中. 題柱空懷乘駟志. 微才愧乏濟川功.
風斤月斧運西東. 雄跨洪河道路通. 金背崢嶸橫海蜃. 玉腰盤屈倚天虹. 馬蹄生電飛鴻外. 龍尾掀雲落照中. 役鵲浮黿眞細事. 經營應識費神功.
홍석주, 연천집 권 4, 度永通橋. 玉河下流也 (두 번째 연행)
三旬門對御河頭. 叵耐風沙滿面愁. 只愛多情橋下水. 不辭相送到通川.
동북쪽에서 잡은 팔리교, 가운데 문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