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北京的“交民巷”牌楼 (2014.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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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북경의 큰길 이름은 대개 ‘路’가 아닌 ‘街’였다. ‘街’에는 반드시 시장이 붙어 있었으니, 街라 함은 곧 街市였다. 이와 달리 ‘路’는 사람이나 수레가 다니며, 그 양 옆이 텅 비어있는 길을 의미했다. 북경성 문 안과 밖의 길은 ‘內大街 ’ ‘外大街’라 했는데, 성 밖도 街라 함은 그 주변에 關廂이 있었기 때문이다. 街보다 규모가 작은 것은 衚衕이라 했고, 이보다 좁거나 구불구불한 골목은 巷이라 했다. 巷은 衚衕의 지맥이었던 셈이다.
성 안에 대가와 견줄 만한 아름다운 길이 있어 이를 ‘巷’이라고 했다. 이 길은 성 남쪽에 있으며 長安街와 길이가 거의 같으며, 숭문문에서 화평문 안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交民巷이라고 한다. 원나라 시절 이 길은 성 밖에 있었으며 江米巷이라고 했다. 명나라 영락 연간 성을 개축하면서 성 안으로 들어왔는데, 大明門 밖에 基盤街를 닦으면서, 東江米巷과 西江米巷으로 나뉘었다. 원나라 때 남방에서 조운한 米穀이 이 일대에서 하역 집산되었는데, 당시 남방의 糯米(찹쌀)를 북방 사람들은 江米라고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일대가 江米巷이 되었다. 남방 사람들은 성 안의 길을 里巷이라고 불렀으니, 이 이름은 남방 사람이 붙였을 것이다.
1860년 제 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와 천진조약을 맺고 외국 사절들을 성 안에 상주하게 했다. 1861년 영국공사는 동강미항의 梁公府에, 프랑스 공사는 純公府에, 미국 공사도 …, 러시아 공사는 강희 연간에 세워진 東正教教堂 俄羅斯館(南館)에 입주하였다. 이후 각국 공사는 동강 미항 일대에 토를 잡았다. 1900년 의화단의 란 이전까지, 동강미항 부근에는 여러 나라의 사관이 있었다. 庚子之變 이후 辛丑條約의 규정에 따라 동강미항은 Legation Street (使館街)가 되었고, 중국에서 그린 지도에는 東交民巷으로 표기되었다.(交民은 外交之民이란 뜻이기도 하고, 江米와도 諧音이 된다) 서강미항은 자연스레 서교민항이 되었다. 동교민항 주변은 서양인들이 자율적으로 관리하는 특수한 租界가 되었다.
동교민항 서쪽 입구와 서교민항 동쪽 입구에는 각각 패루가 基盤街 좌우로 서 있었다. 동패루와 서패루에는 각각 敷文과 振武 편액이 붙어 대칭 형세를 이루었다. (左門右武) 모두 영락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자지란에 부문 패루가 훼손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1954년 3월 양 패루 모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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