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북경과 동북 지역을 이어주는 통로로는, ① 동북쪽 고북구를 나서는 길, ② 동쪽으로 가서 盧龍塞로 나가는 길, ③ 동남쪽으로 가서 渝關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조양구의 역사는 최소한 한 대까지는 추적할 수 있다. 東垻古鎭은 한 대에 생김, 처음 이름은 安樂城, 이후 安德鄕, 鄭村垻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명 만력연간 이후로는 東垻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垻上, 北垻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北京市 朝陽區 紅松園 16號 東垻) 문헌과 유적 양면으로 입증 가능한 조양구의 역사는, 至元 13년(1276) 원나라의 대도 건립으로부터 시작된다.
"元至元四年(1267),忽必烈下令“築新城,城方六十裏 … 分十一門 … 東之右日齊化,東之左日光熙 …” (元史)
"文中位於“東之右”的“齊化門”就是今天的朝陽門." (《順天府志》),。
1419년 북경 천도, 성곽의 축소, 남쪽 문들은 훼손되었고, 동서의 문들은 包築되었다. “舊門名曰齊化, 明以示天齊生化之廟”, “帝出乎震東方在旦” 「勅建東嶽天齊仁聖大帝廟代供紀念碑」(1655) ; “舊有齊化門朝陽關外東嶽大帝行宮, 爲四方香火庇佑群生” (「東嶽大帝聖會碑記」, 1665) ; “東嶽號曰天齊, 尊爲鎭首, 節宣寒暑, 則萬物頓以生成. 鼓舞陰陽, 則四民順以動止.” (「東嶽廟香會記」, 1706) ⇒ ‘제화문’ 이름은 ‘天齊生化’에서 가져온 것이다. 동악묘는 경성 동쪽을 진무하며 생사를 주관한다. 동악묘 남쪽 神路街에 日壇을 건립한 것도 ‘日出東方, 仍爲主生’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 唐玄宗封泰山神爲天齊王,後稱東嶽爲天齊.)
제화문은 종종 ‘杜門’으로도 일컬어졌는데, ‘休憩의 문’이란 뜻이다. 명초에 수리하였고, 1439년에 성루, 옹성, 전루, 閘樓 등을 준공하였다. “梧桐生矣, 於彼朝陽”(시경, 卷阿)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 문이 성 동남에 있으니, ‘迎賓出日’에서 뜻을 취했다. 1697년 (강희 36) 조양문 밖 해자를 준설하여, 조양문과 동직문 밖에 水關을 설치해서 육로 운송의 부담을 상당히 줄였으며, 화물들이 조양문을 통해 창고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粮門이라고도 했음, 옹성문 洞上 에 한 줄기 곡식 이삭[穀穗]을 새겨놓았음. (券門 안에 이삭 줄기를 새겨, ‘朝陽穀穗’의 일컬음이 있었다. ) 내성 9門엔 각각의 용도, 노북경의 전승에 따르면 “九門走九車”, 곡식 수레 출입로였음. 조양문 부근엔 海運倉, 동문창, 祿米倉 등이 있었는데, 해운과 녹미는 지명으로 남아있음. 9개 성문에는 모두 하나의 廟를 두었는데, 정양문에만 2개였다. 조양문 옹성 안에는 관제묘가 있었는데 神牌만 있고 神像은 없어, “九門十座廟, 一廟無神道.”라는 말이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