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1610년(42세)에 이달에게 몇 편 글을 보냈다. 그중의 한 편이 <對詰者>이다. 형리를 연상시키는 키가 크고 무변을 쓴 사람이 허균의 잘못을 따진다..
"문장도 훌륭하고 벼슬도 높아 나랏일을 도모하니 호사스런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왜 조정에서 물러만 나면 불만에 가득차서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리느냐. [畸人] 익살꾼인 얼굴이 시커먼 사람, 술 좋아하는 수염이 붉은 사람, 여우 코의 땅딸보, 애꾸, 눈썹이 붉은 사람. 떠들고 노래하고 세상 만물을 새기고 그리는(?) 일로 즐거워한다. 이러니 그대를 미워하는 자들이 무수하고, 선비들도 등을 돌린다. 도대체 왜 그 이상한 사람들과의 사귐을 끊고 요로의 인사들과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인가?"
허균이 반박한다.
"권모도 없고 아첨도 하지 못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금도 참지 못한다. 권문에 발을 들이면 발꿈치가 쑤셔댄다. 고관과 인사하면 몸이 뻣뻣해진다. 벼슬을 그만두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러지도 못한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통하고 취향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모두 보옥과 같은 사람들이다. 勢利로 사귄 벗은 헤어지지만 우린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 나는 침식을 잊으니, 고관들이야 안중에도 없다. 겁날 것도 없다. 무거운 죄에 빠졌지만, 이들이 아니면 난 죽은 목숨이다."
그는 마치 大巫를 본 듯하다며 허균의 말을 인정하고 물러간다.
40대 초반의 허균은 무척이나 오만하고 방자하였다. 그는 권력의 달콤함과 재부의 안락함을 지녔으며, 강호의 자유와 시정 무뢰배의 일탈의 맛도 즐기고 싶었다. 양지의 권력과 음지의 권력 모두를 향유하고 싶었다. 재주도 넘치고 세상 물정도 널리 알았으며, 권력의 기반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도, 관습, 윤리 밖을 넘나드는 식견과 사상에도 눈이 열렸다. 허균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런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허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정치권력은 훨씬 완강했다. 또 자기 질서를 침범하려는 자에게 조금도 관대하지 않았다.
허균이 죽은 지 350년 정도 지나 미국 미시시피강 가에 그의 후손이 태어난다. 허클베리핀이다. 흑인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탈출하는 중에 우연히 두 사람을 태우게 되는데 모두 터무니없는 사기꾼들이다. 입만 열면 뻥을 치고, 교묘한 속임수와 거짓으로 위태롭게 세상을 떠도는 자들이다. 헉은 캐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엄밀하게 보면 허균과 허클베리핀은 종류가 다른 사람이지만, 왜 헉의 이야기에서 허균의 <대힐자>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내가 하는 일이나 생각의 이유를 나라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혹 뒷날 이유를 알게 될까? 뒤에 보면 왜 그때 이런 글을 적었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잊혀질 가능성이 더 많다. 그저 적어나 본다.
"이 것짓말쟁이들이 왕도 아니고 공작도 아니며, 그저 천한 사기꾼에다 협잡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맏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게 최상의 길이었다. 그렇게 해두면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왕이니, 공작이니 하고 불러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또 짐에게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고 해서 짐에게도 잠자코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지만, 이런 종류의 인간들과 함께 살아나가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라는 요령 하나만은 배운 셈이었다." (태혜숙 옮김, 중명,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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