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다른가? 아니면 사랑하는 방법의 차이인가? 자타공인 나는 사랑을 모른다. 화장실에서 틈틈이 예전 읽은 "영웅문"을 들척이는데, 南帝 단황야와 유귀비(영고)의 인연이 눈길을 끈다. 젊은 시절 영고는 대리국을 찾은 주백통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주백통은 떠나가고 그의 아이를 낳아 기른다. 황제는 이들의 관계를 시샘한다. 어느날 구양봉이 유귀비의 아이에게 중상을 입힌다. 유귀비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지만 질투에 사로잡힌 황제는 거절하고, 귀비는 아이를 죽인 뒤 복수를 다짐하며 떠난다. 이 일로 황위에서 물러난 남제는 깊은 산에 숨어 살며 그녀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왔다. 이는 남제가 어초경독 및 곽정 황용에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다.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녀는 줄곧 나를 존중하고 무서워하면서도 부드럽게 시중을 들어주면서 내 뜻을 어긴 일이 없었다네. 그러나 나를 사랑한 적은 없었어.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러나 그날 주사형에 대한 그녀의 눈길을 보고야 알게 되었지. 한 여자가 진정으로 한 남자를 사랑할 때 저런 눈길로 보는 것이로구나 했네." (5책 166쪽)
유귀비는 주백통과의 사랑을 표시하는, 원앙이 수놓아진 베수건을 그가 떠나간 뒤에도 목숨처럼 간직했고, 남편이자 황제 앞에서도 감추지 않았다.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죽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린다. 순간에 모든 것이 담긴, 전 인생을 불사르는, 이런 게 사랑인가? 황제도 귀비를 사랑했지만, 그는 결국 버려졌다. 그는 그저 그녀를 배려하고 존중했기 때문인가? 강렬한 일체감, 합일감이 사랑인가? 황제 段智興은 유귀비와 주백통의 관계를 묵인하고 용서했으니, 그건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어중간한 황제의 태도는 외려 유귀비의 뼛속 깊은 증오와 원한만을 샀다. 문득 관용과 배려로 대했지만 사랑을 얻지 못한 단지흥의 삶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이런 부분들이 없이 허망한 무협으로만 일관했다면 이 소설이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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