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음식

화산도의 음식들

검하객 2018. 5. 31. 09:40

  김석범의 "화산도"에는 유난히 음식에 대한 묘사가 많다. 소설을 쓰면서 고국에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된 작가는, 음식의 풍미를 섬세하게 떠올리면서 제주의 분위기에 젖고 인물들의 성격을 빚어낸 것이 아닐까?   

 

 

단팥빵과 남승지의 가난 

남승지는 그 며칠 전, 종로에 있는 단성사에서 프랑스 영화인 죄와 벌을 보았다. 일본어 자막이 붙은 낡은 영화였다. 단성사 앞의 도로를 스치는 바람에 작은 먼지가 날아올랐다. 초저녁부터 최종회까지 그 영화를 되풀이하여 보았다. 그는 심각해지고 싶었다. 22살이면 아직도 그럴 만한 나이인지도 모른다. 남승지는 인간이 인간을 죽일 권리, 아니 기생충 같은 노파를 죽일 권리가 없다면, 과연 벌레를 죽일 권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길을 걸었다. 여읜 손등에 두꺼비 등처럼 돋아난 물집이 가려워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저녁 대신 단팥빵 두 개로 때운 배를 움켜쥐고 걸었다. 별이 반짝이는 우주의 넓이가, 그 깊이가 두려웠다. 민족, 국가, 조국 그런 것은 地球儀처럼 의식 속에서 조그맣게 축소되어 멀어져간다. 조국이 뭐란 말인가 (1책 57,8)

 

돼지새끼회와 이방근 (제 2책)

 

새끼 회는 어미 뱃속에 든 새끼 돼지를 양막(羊膜)과 함께 저미듯 다져서, 식초·고추장·후춧가루·고춧가루·참기름·참깨·설탕·간장·마늘·파 등 갖은 양념을 넣어 맛을 낸다. 거기에다 조심스럽게 받아두었던 羊水를 적당히 넣어 섞으면 된다. 언젠가 주인이 이방근에게 말해준 적이 있지만, 어미 뱃속에 있는 새끼 돼지라 해서 모두 횟감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끼를 밴 지 한 달 내지 한 달 반 정도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돼지의 임신 기간은 보통 14개월 정도인데, 2개월이 지나버리면 새끼회로 먹기에는 이미 늦게 된다. 또한 도살 후, 여름에는 10시간, 겨울에는 24시간이 지나면 좋지 않다. 주인이 잡은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 데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방근은 두세 숟갈을 계속 입에 넣었다. 이빨에 오도독오도독 하는 상쾌한 감촉이 느껴질 만큼 가볍게 씹으면서, 작은 연골을 혀끝으로 발라낸 뒤 꿀꺽 삼킨다. 때로는 연골까지 씹어 먹는다. 양수와 피가 섞인, 생명의 원초에서 솟아나오는 듯한 깊은 맛이 갖은 양념맛을 제치고 입 전체에 퍼져간다. 두어 숟갈 먹을 무렵이면 이 비린내가 역겨워져서, 청주와 함께 마시면서 냄새를 없애지 않으면 삼키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너무 양념을 많이 넣어 이 미묘한 생명의 냄새를 지워버리면, 그건 더 이상 새끼회가 아니다. (13,4) 

 

오사까 이카이노거리의 조선 음식 (제 2책)

 

저녁에 세 식구만의 식사를 끝내고(그것은 최후의 만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머니의 자상한 마음이 담긴 음식이었다), 8시 반경 집을 나왔다. (196,7 / 앞부분 확인)

 

제주도의 흑돼지 (2책)

 

이방근은 주전자에 조금 남은 술을 따라 마시고, 어린애 손바닥만 한 돼지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타원형으로 보기 좋게 잘라진 순대의 쌉쌉한 맛도 일품이지만, 역시 돼지고기는 맛이 있다. 비계가 붙은 얇은 분홍빛 살점이 입안에서 청주를 빨아들여, 씹히는 맛과 함께 녹아가는 감촉은 아무리 먹어도 맛있다. 이 섬의 흑돼지는 고기가 유난히 쫀쫀하다. 그 고기 맛을 배우면, 다른 곳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을 마음이 나지 않는다. (244)

 

강몽구는 상치와 젓갈에 식욕이 솟아난 듯,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왔다. 어디서나 항상 먹을 수 있는 시골음식이라 신기한 것도 아니었지만, 강몽구는 상치 잎에 밥을 얹고 거기에 멸치젓을 듬북 얹어 싸더니, 입속에 잔뜩 틀어놓고는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강몽구는 정말 잘 먹었다. 빨간 고춧가루가 묻어 있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사고, 거기에 다시 젓갈을 얹어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접시에 가득한 돼지고기를 거의 혼자서 먹어치웠다. 잘게 채 썬 무와 함께 끓인 갈치국이 시원해서 좋았다. (277)

 

마늘과 풋고추를 넣은 생선조림의 달콤새콤한 냄새와 어리굴젓 등의 젓갈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좁쌀청주 냄새를 풍기는 주전자가 상에 올라 있다. 밥상 옆에는 죽 그릇이 얹힌 쟁반이 놓여 있었다. 하얀 사발에 담긴 전복죽 표면에서 뜨거운 김과 함께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약간 섞인 참기름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소한 냄새가 죽 전체의 향기를 더한층 돋우어준다. (290)

 

좁쌀청주와 전복젓갈 (제 4책)

 

(부자 겸상, 최상화와의 관계에 대한 건의) 그는 좁쌀청주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흘려너헜다. 그리고는 청주의 자극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입안에 전복젓갈을 넣고 씹는다. 전복내장의 맛을 몇 배로 농축시킨 듯 쌉쌀한 감칠맛과 고춧가루의 매운 맛이 청주의 자극으로 마비된 혀와 부드러운 점막에 겹치면서 맛도 냄새도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피어올라, 입안에 난기류를 일으킨다. (190)

 

미역을 넣은 생선국 (제 5책)

 

이방근은 미역을 넣어 끓인 생선국의, 구수한 참기름향기가 섞인 냄새를 맡고 자기도 모르게 식욕이 동했다. 이거라면 뱃속이 받아들여주겠지. 그는 우선 뜨거운 국으로 속을 풀고 나서, 찻잔의 청주를 단숨에 마시고, 목구멍을 찌르는 청주의 자극에 카아 하고 숨을 토해냈다. 독한 술은 식도를 태우며 뱃속으로 떨어져, 꽃불처럼 천천히 위장에 퍼져가 고인다. 무수한 바늘 끝으로 찌르듯 위벽이 마비되는 느낌이다. 반 홉도 채 못 되는 술로는 해장술이라고 할 만한 양도 아니었다. 해장술을 마신 것은 아니다. 깨진 종이 울리는 듯한 두통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는 숙취를 빨리 깨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이렇게 아직 숙취가 깨지 않은 머리를 술로 적셔 가벼운 취기에 잠겨 있으면, 이윽고 머리의 아픔도 가라앉는 법이다. 그리고 새로운 취기가 곧 깰 무렵에는, 웬만한 숙취는 함께 사라져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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